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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와룡선생 제갈량과 현덕 유비

양사랑 2012. 3. 27. 09:13

와룡선생 제갈량과 현덕 유비

 

유비(161~223, 자는 현덕(玄德))는 탁군(涿郡) 탁현(涿懸), - 지금의 하북성 탁주사 사람으로 한나라 경제의 아들 산정왕(山靖王) 유승의 후손이다. 유비의 조부 유웅(劉雄)은 일찍이 현령을 지냈으며, 부친인 유홍(劉弘) 또한 주군에서 벼슬해 소관(小官)을 지냈다. 서한 경제로부터 동한 환제까지는 200~300년의 시차가 있어(유비는 환제 연희 4년에 출생) 세계가 멀고 아득하니 유비는 그저 동한 황실의 먼 종실이라 할 수 있을 뿐이며, 집안도 대를 거듭할수록 쇠락해 가고 있었다. 게다가 부친 유홍이 일찍 죽어 감내하기 힘든 가난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모친과 함께 힘든 노동을 했으며, 돗자리를 짜거나 짚신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유비는 평소 말수가 적고 사람들을 잘 단합시켰으며,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많은 젊은이가 그와 즐겨 왕래했다. 이렇게 해서 유비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 그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하동 해현(解縣), -지금의 산서성 의현 서남쪽- 사람으로 관우(關羽: ?~220, 자는 운장(雲長)), 탁군 사람 장비(張飛: ?~221, 자는 익덕(翼德))였다. 이들 세 사람은 같은 침상에서 잠자며, 마치 형제 같았다.” 당시 유비는 고향에서 무리를 규합했는데, 관우와 장비가 좌우에서 모시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비록 수많은 사람이 빽빽이 앉아 있는상황이라도 관우와 장비 두 사람은 하루 종일 모시고 서서조금도 피곤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유비가 매번 곤경을 당할 때마다 관우와 장비는 즉각 몸을 일으켜 어렵고 위험한 일을 피하지 않았다.” 장비는 관우보다 몇 살 적었기에 그를 형처럼 모셨다. 이처럼 유비·관우·장비 세 사람은 젊었을 때부터 이미 같은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골육과도 같은 관계였다. 관우는 일찍이 장료(張遼)에게, “유장군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서했으니 그를 배반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비에 대한 관우와 장비의 충성은 만 번 죽어도 바뀌지 않을 만큼 굳건했지만 과연 도원에서 결의형제를 맺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의 기록이 없다.

 

유비는 군웅들이 각축을 벌일 때 비록 두 차례에 걸쳐 서주 목사로 임명되긴 했지만 뭔가를 행할 만한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다. 건안 5(200), 그는 다시 조조에게 패해 어쩔 수 없이 원소에게 몸을 의탁했지만, 오래지 않아 원소가 사람을 잘 쓰지 못하고 내부에 모순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그를 떠났다. 그는 여남에 도착해 농민군 공도(龔都)등의 부대와 합류해 조조의 장수인 채양(蔡陽)을 죽였다. 관도 싸움이 끝난 뒤 조조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자 유비는 대항할 방법이 없음을 알고 남하해 유표에게 의탁하니, 때는 건안 6(201)이었다. 유표는 조조가 형주를 공격할까 두려워하고 있던 중에 유비가 온다는 말을 듣고 아주 기뻐했다. 유비에게 약간의 병력을 주고 신야(지금의 하남성 신야현 남쪽)를 지키게 해 조조를 막는 1차 방어선으로 삼았다. 후에 유비는 다시 번성(지금의 호북성 양번시 북쪽)으로 옮겼다.

 

유비는 이때 이미 불혹의 나이였다. 그러나 십 수년 동안 좌절을 맛보며 여기저기 번갈아 몸을 의탁하면서도 시종 편안히 몸을 안정시킬만한 한 치의 근거지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 마음속의 울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형주에 이르니, 워낙 명성이 있었기에 양양의 사대부 중 많은 사람들이 그를 흠모했다. 유비는 비록 실의에 빠져 형주 땅을 밟았지만 한실을 중흥하겠다는 뜻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선주에 귀의하는 형주의 호걸들이 더욱 많아졌다.” 심지어 유표의 휘하에 있던 이적(伊籍) 같은 사람은 수시로 유비와 왕래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유표는 불쾌함을 느꼈다. 게다가 유비가 평소 효웅(梟雄: 『삼국지』「선주전」주에 인용된 『한진춘추』. 효웅이란 사납고 용맹한 영웅이라는 뜻임)’이란 칭호로 불리자, 그에 대한 의심과 시기심이 일어나 몰래 경계하고 있었다.

 

세월은 총총 흘러 유비가 형주에 온 지도 어언 여러 해가 지났다. 하루는 유표가 그를 초대해 술을 마셨는데, 마시고 즐기는 사이 유비가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자신의 허벅지 안쪽에 살이 잔뜩 쪄 있는 것을 발견하곤 자신도 모르게 처량해져 눈물을 흘렸다. 자리에 돌아오자 유표가 그의 얼굴에 난 눈물자국을 보고는 깜짝 놀라 그 연유를 물었다. 유비가 탄식하며 말했다. “제 몸은 항시 안장을 떠난 적이 없어 허벅지에 살이 찔 새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말을 타지 않아 허벅지에 살이 쪘습니다. 세월이 쏜살같이 흐르니 저도 이제 곧 늙어갈 텐데,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이렇게 슬퍼하고 있습니다!” 유비의 이 말은 확실히 폐부 깊숙이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고생고생하며 떠돌다 뜻도 이루지 못한 채 곧 늙어버릴 생각을 하니 어찌 처량한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조조가 남침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면서 형주에는 불안한 정서가 어둡게 깔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표가 조조의 공격에 저항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모든 기대를 유비에게 걸었다. 유비는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며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수하에 인재는 없고, 비록 관우·장비·조운 등의 무장들 모두 만인을 상대할 만한용장이지만, 병사라고 해봐야 고작 수천에 불과하니 어찌 조조의 대군에 맞설 수 있으랴? 미축(), 간옹(簡雍), 손건(孫乾) 등과 같은 문관은 재능이 중간 정도로 기발한 계책이 없으니, 모신(謀臣)만 해도 구름같이 많은 조조에 어찌 대항할 수 있으랴? 유비는 매번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잠결에서조차 편할 수가 없었다.

 

유비는 여러 해에 걸친 자신의 경력을 되돌아보면서, 실패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뛰어난 지략을 지닌 인사가 없는 점이라 느끼게 되었다. 그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은 마치 장량(張良)처럼 군의 장막 속에서 대책을 마련해 천리 바깥에서 승리를 거두는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형주의 중심인 양양에는 걸출한 인재가 모여 있으니 자신이 마음을 비워 구하기만 하면 그런 인물도 구하기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특히 양양에서도 이름이 드높은 수경선생 사마휘를 찾았다.

 

수경선생은 그에게 성심껏 말해주었다. “속된 유생이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겠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아는 자는 준걸 중에 있습니다.”

어떤 인물이라야 준걸이라 할 수 있을까요?”

“ ‘때를 가늠하고 세()를 살펴 마음 속에 구체적 계획을 세우는자입니다. 바로 시대 풍운의 변화를 통찰하고, 가슴속에 나라를 편안히 할 수 있는 웅대한 지략을 갖출 수 있는 자입니다.”

유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었다. “어디로 가면 그런 준걸을 만날 수 있는지요?”

사마휘가 대답했다. “바로 이 공장에 엎드린 용봉황의 새끼가 있습니다.”

 

유비가 황급히 이들 두 사람이 누군지 물었다. 사마휘가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바로 제갈량과 방사원입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뻤다. 그렇게 조석으로 갈망하던 현재(賢才)가 바로 양양에 있었다니! 그러면서 유비는 엎드린 용이 허공을 날아오르고 봉황의 새끼가 날개를 퍼덕이며 높이 날아오르니, 이들을 휘하에 둘 수만 있다면 한실을 일으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고 생각했다.

 

유비가 하루 속히 모시고 싶은 영재들의 소식을 사마휘에게 전해 들은 뒤, 제갈량의 절친한 친구 서서가 이 소식을 듣고서 신야로 가서 유비를 배알했다. 유비는 의사당(議事堂)에서 그를 만났는데, 만나보니 재주도 많고 학식도 풍부하며 논의도 순발력이 있어 머무르며 자신을 보좌하도록 했다. 서서는 유비가 이름 없는 선비를 깍듯이 예로 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정중히 공명을 추천했다. “제갈공명이란 자는 와룡이라 불립니다. 장군께서 만나보고 싶지 않으신지요?”

 

유비는 이미 두 차례나 와룡의 이름을 들은 터라, 역시 비범한 인재라 여기고 얼른 대답했다. “그렇다면 한 번 같이 모시고 와주시겠소?”

서서가 대답했다. “그 사람은 가서 볼 수는 있어도 데려올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한번 왕림해서 보셔야만 합니다.”

 

유비는 현인을 구하려는 절박한 마음에 자존심을 굽혀가며 융중으로 와룡선생 제갈량을 만나러 세 번이나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났다.” 바로 역사상 유명한 삼고초려 이야기다. 사서에는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상세히 그리고 과장되게, 매번 찾아갈 때의 시간, 기후, 환경, 인물 및 감정까지도 생동감 있고 변화무쌍하게 묘사해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어떤 문헌에서는 제갈량이 산을 나서 유비를 보좌한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르게 기술한다. 공명이 산을 나선 것은 유비가 세 번이나 찾아 갔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추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유비가 번성에 머물고 있을 때 조공이 막 하북을 평정했다. 제갈량은 형주가 다음 차례인 줄 알았지만, 유표는 성격이 우유부단한 데다 군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므로 북쪽으로 가서 유비를 만나려 했다. 그런데 유비와는 친교가 없고 그보다 나이도 어려, 마음을 먹고 찾아가 그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어떤 논자들은 이 기록에 의거해 삼고(三顧)’의 설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의심은 근거가 없다. 진수는 『삼국지』를 쓸 때 자료를 아주 조심스럽게 검토했으며, 특히 초나라 사람이었던 만큼 제갈량에 대해 쓸 때는 더욱 신중했다. 따라서 그가 「제갈량전」에서 유비가 세 차례 찾아가제갈량이 마침내 만났다고 한 내용은 믿을 만하다. 가장 설득력 있는 자료인 「출사표」에서 제갈량은 이렇게 말한다. “선제께서는 보잘것없는 신을 위해 스스로를 굽혀 세 번이나 신의 오두막을 찾으셔 당세의 일을 자문하셨습니다.” 신하가 황제에게 글을 올릴 때는 허황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만약 삼고초려의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제갈량이 이렇게 쓸 수 있었겠는가?

 

제갈량이 유비를 보좌하고자 결심한 이유

 

동한 말년 군웅들이 할거하며 서로 겨루던 시기, 천하를 재패하려던 수많은 인주(人主)들은 하나같이 영재를 얻어 도움을 받으려 했다. 동시에 재주를 품고 큰 뜻을 펼쳐보고자 하는 선비들 또한 각자 재주와 지혜를 드러내며 인주를 택해 섬기고자 했다. 이런 까닭에 풍운이 휘몰아치던 이 시기에 특별히 많은 인재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수년간에 걸쳐 먹고 먹히는 전쟁을 겪으면서 산림에 은거한 영재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제갈량도 그 중 하나였다. 그의 정치적 목적은 한실을 도와 다시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조를 나라의 도적으로, 손권을 명을 훔친 자로 본 것이니,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명주(明主)나 현군(賢君)을 찾을 수 없었다면 제갈량은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융중에서 농사짓고 책 읽으며 「양보음」을 소리 높여 읊은 것도 어느 정도 이런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말했다. “태공이 90이 된 것은 만나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 주군(主君)을 면밀히 따져서일 것이다.” 임금도 신하를 택하지만 신하도 군주를 택해야 하니, 둘이 잘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유감이 없다. 그럼에도 끝내 현군이 없다면 의로운 선비는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니, 차라리 뜻을 버리고 마치 바위처럼 자신의 목숨이나 굳건히 기르는 것이 낫다.”

 

사실 정치적 관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때 제갈량이 조조나 손권의 휘하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상으로도 이미 늦었다. 조조의 수하에 모인 여러 인재들은 모두 한 시대의 인물들이었다. 이 때문에 조조는 득의만만하게 말했다. “내가 의병을 일으켜 폭도와 난적을 죽인 것이 지금까지 19년인데(188~207), 정벌에 나서 반드시 이겨낸 것이 어찌 내 공이겠는가? 현명한 사대부들의 힘이다.” 그리고 손권의 좌우에도 역시 인재가 즐비해 각자 좋은 계책을 올리곤 했다.

 

이에 비해 삼고초려의 유비는 동분서주하며 싸웠지만, 20년이 지나도 몸을 편안히 지킬 만한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했다. 그렇긴 해도 그에게는 다른 인주들이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점이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제갈량은 마침내 산을 나서 유비를 보좌할 결단을 내렸다. 그가 결단을 내린 이유는 으레 다음의 다섯 가지 정도였을 것이다.

 

첫째, 유비는 스스로 제실(帝室)의 후손이라 하면서 공개적으로 한실의 부흥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정통관념이 짙었던 동한 말엽에는 상당히 호소력이 있었다. 왕망이 세웠던 신나라 말엽, 녹림(綠林)과 적미(赤眉)들의 농민군을 일으킬 때도 ()을 생각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염두에 두고 서로 앞 다퉈 왕망에 반대해 한을 부흥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유()씨 성의 종실 후예를 수령으로 내세웠으며, 그 결과 모두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그러므로 유비가 당시 황실의 후예라는 것은 조조를 반대하고 한을 부흥하는데 꽤 유리한 조건이었다. 제갈량은 망해가는 한실의 부흥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과 뜻이 같은 현군을 보좌해 반도들을 물리치고 천하를 깨끗이 해, 만백성이 바라는 문경의 평화로운 세상을 재현하고자 했다. 이렇게 볼 때 그와 유비는 정치적 관점에서 완전히 일치한 셈이다.

 

둘째, 유비는 걸출한 영웅의 품격이 있어 평소에도 영웅이란 칭송을 받았다. 정욱(程昱)이 말했다. “유비에게는 영웅의 재질이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얻었으며, 끝내 다른 사람의 수하가 되지 않았다.” 조조마저도 유비는 내 짝이라 했다. 유비를 자기에 필적할 만한 맞수로 본 것이다. 유비에겐 확실히 보통사람과 다른 무엇이 있었다. 손권 또한 이렇게 말했다. “유비가 아니었다면 조조를 당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유비의 영웅적 자질과 큰 스케일은 양양에 있는 뭇 현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그는 형주에 머물면서 7~8년간 다방면의 인사들과 접촉해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얻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마덕조와 서서가 어찌 재차 그에게 제갈량을 추천했겠는가?

 

셋째, 유비는 강함과 부드러움을 고루 갖추고 있었으며, 백 번 부러져도 좌절하지 않는 기질을 지녔다. 여러 차례 전투에 패했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섰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도겸·조조·원소·유표 등에게 의존했지만 애벌레가 움츠리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니”, 비록 다른 사람의 울타리 안에 있어도 끝까지 자신의 뜻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형주에 머물면서 세월이 흘러 비록 스스로 쇠퇴해 가는 것을 느꼈지만 조조에 대항해 한을 부흥한다는 처음의 뜻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원대(元代)의 사학자 호삼성(胡三省)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확고해진 유비의 심정을 찬탄해 말하기를, “유비는 호방한 기운이 쇠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를 삼등분하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 나라를 세울 군주라면 승리해도 교만하지 않고, 패배해도 기죽지 않는태도가 중요한 조건이다. 만약 조그만 좌절을 맛보고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면 무얼 이루기는 불가능하다. 제갈량은 유비의 처지와 심지를 제대로 알아보고, 같이 왕업을 이룰만한 인주라 생각했다.

 

넷째, 유비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아주 독특한 그만의 능력이 있었다. 도겸은 죽기 전에 그를 서주 목사에 추천했고, 조조는 허도에 있을 때 그를 예주 목사에 봉했으며, 원소 역시 그를 예우했다. 이런 사례들은 모두 그의 독특한 인간관계를 증명하는 것이다. 특히 유비는 어질고 사람을 사랑하며,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의리를 위해 재산을 뿌리며, 무리와 쓰고 단 것을 같이할인물로 여겨졌고, 줄곧 인의의 모습으로 비춰짐으로써 비록 험하고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인의를 더욱 밝히며, 쫓기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언어에 도()를 잃지 않을인물로 평가되었다. 이로 인해 유비는 많은 선비와 백성들에게 상당한 호소력과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만약 그의 덕업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 들지 않았다면 208년 조조의 대군이 남하할 때 형주의 선비와 서민, 노약자 10여만 명이 무엇 하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유비를 따라갔겠는가? 이처럼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사상은 세상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하겠다는 제갈량의 뜻과 딱 맞아떨어졌다.

 

다섯째, 유비는 선비들을 예로 대우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했다. 이 때문에 관우·장비·조운 등이 만리나 떨어져 있어도 변함없이 따르며 생사를 돌보지 않았다. 유비가 신야에 머물게 되자 형주 양양의 많은 사람들이 즐겨 교유하고자 했으며, “의로운 선비들은 그와 함께라면 패배조차 기꺼이 달게 받고자 했다.” 이런 상황들로 미루어 보면, 유비가 넓은 아량으로 여러 방면의 인재를 잘 단결시켰음을 알 수 있다. 삼고초려에 이르러서는 일개 평범한 사람에게 유례없는 파격적 예우를 했다. 상나라 탕왕의 어진 재상 이윤(伊尹)()이 사람을 시켜 초빙하니, 다섯 번 거절한 뒤에야 탕을 따르기로 했다고 한다. 이것은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탕은 사람을 시켜 초빙하려 한 것이니, 어찌 유현덕이 수고로움을 마다 않고 세 번이나 오두막을 찾은 것과 같겠는가? 공명은 바로 이 은혜에 감격했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것이 고대 지식인들이 숭상하던 미덕이었으니, 제갈량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나라의 선비로 대하니, 나도 나라의 선비로서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마침내 유비의 한실 부흥의 대업을 위해 온몸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이로부터 제갈량은 산 좋고 물 맑은, 소나무와 대나무로 숲을 이룬 고요한 융중의 산촌을 떠나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제갈량이 산을 내려온 것은 여러 가지를 고려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는 세 번이나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났다고 한 것은 결코 자신의 성가(聲價)를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런 척해 유비의 성의를 시험해 본 뒤 판단을 내린 것이다. 공명은 결코 경솔히 일을 행하지 않았는데, 바로 그의 신중한 측면이 드러난 부분이다. 유비의 삼고초려는 건안 12(207)의 일로서, 이때 유비는 47, 제갈량은 27세였다. 군신 두 사람의 천하대세에 대한 첫 회의는 이렇게 융중 오두막에서 시작되었다.

 

공명이 융중에서 제시한 대책

 

유비는 융중의 오두막에서 제갈량을 처음 보았을 때, 눈앞의 청년서생이 인물도 훤칠한 데다 몸가짐도 비범해 과연 와룡이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다고 느꼈다. 그래서 유비는 그에게 성심껏 가르침을 청했다. “한 조정이 쇠미하니 간신이 조정을 도적질해 황상은 이리저리 떠돌며 온갖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가늠해 보면 모든 게 미약해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천하에 대의를 펴서 한실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수완이 없는 데다 계책도 부족해 엎어지고 넘어지고 하며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의기소침하지 않습니다. 이제 특별히 선생께 가르침을 청하니, 내 목표를 실현하는 데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겠습니까?’

 

제갈량이 유비를 만나보니 심지가 밝고 곧으며, 장대한 뜻을 잃지 않았고, 처음 보는 자리에서 마음 속의 일을 간절히 말하니 자신을 얼마나 신임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깊은 감동을 받고 마침내 자신이 오래전에 계획해 둔, 한실을 중흥시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대책을 이전부터 마음이 끌리던 이상적 인주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동탁 이래 호걸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주나 군을 몇 개씩 차지한 자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조조는 원소에 비해 명성도 미미하고 무리도 적었으나 그럼에도 조조가 원소를 막아 약한 군대로 강한 군대가 된 것은 딱히 하늘의 도움을 받을 때여서만이 아니라 사람의 모의(謀議)가 작용한 것입니다. 이제 조조는 이미 백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천자를 옆에 끼고 제후를 호령하고 있으니 진실로 그와는 선두를 다툴 수 없습니다. 손권은 강동을 점거한 지가 이미 삼대에 이릅니다. 나라가 요새같이 험하고 백성이 잘 따르며, 어질고 능력 있는 자들을 등용하고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도모할 수 없습니다. 형주 북쪽으로는 한수와 면수가 있어 남해(南海)의 이점을 다 누리며, 동쪽으로는 오회(吳會)와 잇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파촉(巴蜀)과 통하니 이곳은 무력을 쓸 만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지킬 능력이 없으니 이번 일은 아마도 하늘이 장군을 돕는 듯합니다. 장군께서 어찌 이런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익주는 험한 요새에다 비옥한 평야가 천리나 되는 하늘이 내린 땅으로 고조께서도 여기를 근거로 황제가 되셨습니다. 유장(乳璋:자는 계옥(季玉))은 사리에 어둡고 약하며 북쪽에 있는 장로(張魯)는 백성도 많고 나라도 부유하지만 백성을 불쌍히 여길 줄 모르니, 지혜롭고 유능한 선비들은 명군(明君)을 얻고자 합니다. 장군께선 제실의 후손으로 천하에 신의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영웅을 포용하며 어진 이를 목마르게 찾고 계십니다. 만약 형주와 익주를 동시에 차지한다면 지형적 장애에 의존하면서 서쪽으로 융()과 화합하고 남쪽으로 이()와 월()을 무마하며, 바깥으로 손권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안으로 내치(內治)에 힘쓸 수 있습니다. 그러다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편으로는 상장군에게 명령해 형주의 군대로써 완을 거쳐 낙양으로 진격해 들어가게 하고, 장군께서 순수 익주의 무리를 이끌고 진천(秦川, 지금의 섬서성과 감숙성의 사이로서 진령 이북 지대)에서 출발한다면, 백성들 중 누가 감히 소쿠리밥과 물병을 들고 장군을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이렇게만 된다면 패업을 이룰 수 있으며 한실을 다시 일으킬 수 있습니다.”

 

불과 300여 자 정도 되는 이 짧은 글이 그 유명한 융중의 대책인데, 일반적으로 이것은 「융중대」또는 「초려대」라 부른다. 이 문장에는 천하의 형세가 정치(精緻)하고도 생동감 있게 분석되어 있고, 제갈량의 전략과 대책이 잘 나타나 있으며, 유비를 위한 절실하고도 실행 가능한 노선이 잘 제시되어 있다.

 

첫째, 이 문장은 당시의 정치적·군사적 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동탁에 의해 조정의 기강이 어지러워진 이래 군웅들이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먹고 먹히는 싸움을 거치면서 많은 할거세력들이 소멸되어, 북방에는 세력이 가장 강한 조조만 남게 되었다. 그는 이미 ‘100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고, 병사와 장수도 무척 많았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는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므로 유비로서는 대적할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와는 선두를 다툴수 없다고 했다. 손권 역시 강동에서 이미 삼대에 걸쳐살고 있는 데다 지형이 험하고 백성이 잘 따르며 정권이 안정되어 있었으므로 유비로서는 그와 사이좋게 지낼 수는 있어도 공격할 대상은 아니었다.

 

둘째, 공명은 형주와 익주를 취해 근거지로 삼는 전략을 제시했다. 형주 지역은 넓고도 형세가 험해 무력을 쓸 만한 나라였다. 그러나 유표가 어리석고 나약해 그저 지키고만 있으니, 이것은 하늘이 유비에게 내린 절호의 근거지였다. 산천이 험악해 요새와도 같은 익주는 비옥한 평야가 천리나 뻗어 있고, 백성이 많고 나라가 부유해 고조 유방이 여기를 근거로 해 제업(帝業)을 이루었다. 그러나 익주 목사 유장은 어리석고 무능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니 지혜롭고 유능한 선비들은 명군을 얻으려 한다.” 그러니 유비는 응당 기회를 보아 익주를 취해야 한다. 만약 유비가 형주와 익주 두 주를 아우를 수 있다면 조조, 손권과 함께 천하를 삼분하는 정족(鼎足)의 형세를 취할 수 있다.

 

셋째, 형주와 익주는 통치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대책을 취해야 하므로 도움을 줄 수 있거나 동맹을 맺을 수 있는 나라가 있어야 한다. 제갈량은 응당 형주와 익주의 험한 지형을 충분히 활용해야 하고, 백성을 안정시켜 통치를 강화해야 하며, 유능한 인재를 초빙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방과 남방의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단결정책을 취해 후방의 걱정을 감소시키며, 손권과는 더 나은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조조를 견제하는 중요한 힘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만 된다면 열세를 우세로 전환시켜 전력을 집중해 한실의 권력을 훔친 원흉 조조를 공격할 수 있다.

 

넷째, 적당한 시기를 선택해 군대를 둘로 나눠 가위 모양으로 조조를 협공해 두 수도를 회복해 한실을 부흥시킨다. 그렇다면 총공격을 감행할 가장 좋은 시기는 언제인가? 제갈량은 천하에 변동이 있을 때를 틈타야 비로소 공격할 수 있다고 했다. 소위 변동이 있다는 것은 조조의 통치에 거대한 변화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내부의 모순이 첨예화되어 사분오열되거나, 농민의 난이 발생하거나, 정권이 위기에 처하거나, 또는 외적이 침입하거나, 재환(災患)이 계속될 때 등이다. 동시에 유비 측에서는 백성을 기르고 모으며, 가르치고 훈련시킨뒤 지속적으로 발전시킨 경제력을 바탕삼아 군대를 둘로 나누어 북벌에 나선다. 한쪽은 형주를 출발해 완(남양)을 거쳐 낙양으로 쳐들어가며, 한쪽은 유비가 익주의 무리를 인솔해한중에서 진천으로 들어가 장안을 공격한다. 이렇게 동서를 동시에 공격하면 적은 앞뒤를 돌보지 못한다. 만약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마침내 한실을 중흥시켜 오랜 숙원을 실현시킬 수 있다. 이때가 되면 강동에 할거해 있는 손권을 해결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 보다 더 쉽다.

 

다섯째, ‘사람의 모의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사람이 하늘을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피고 세를 가늠해 자신에게 유리한 요소를 발휘한다면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고, 약한 군대로 강한 군대를 이길 수 있다. 이렇게 그는 유비의 투지를 고무시키고 필승의 신념을 굳히도록 했다. 제갈량은 얼마 지나지 않은 관도 싸움에서 조조가 승리한 예를 들어, “명성도 미미하고 병사도 적었던조조가 병사도 많고 양식도 충분하며 명성도 혁혁했던 원소를 마침내 패배시켰던 주요 원인을 상기시켰다. 즉 그것은 조조가 많은 논의를 거쳐 적절한 판단을 내렸고, 적의 약점을 활용해 과감하고 결단력 있게 밀어 붙였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그러므로 유비에게 단순히 천명을 맹신해서는 안 되며, 더욱이 목전의 궁벽한 상황에 의기소침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다. 제갈량은 또 유비가 사람의 모의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유리한 조건을 많이 가졌다고 지적한다. 첫째, ‘제실의 후예이기 때문에 한실 회복의 기치를 내건 것은 호소력이 있다. 둘째, 좋은 이름이 세상을 덮어 신의(信義)로써 천하에 알려져사람 죽이기 좋아하는 조조에 비해 백성들에게 훨씬 더 영향력이 있다. 셋째, “어진 이를 생각하기를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하고”, 성심으로 사람을 대해 형주와 익주의 어질고 유능한 선비들이 오래전부터 경모해왔으므로, 뭇 인재를 초빙해 재주에 맞게 사용할 수만 있다면 이들은 패업을 위해 필요한 온갖 헌책을 내놓을 것이다. 종합하면, 유비가 사람의 모의를 충분히 발휘해 기회를 틈타 움직이기만 한다면, 먼저 형주와 익주를 취해 집으로 삼고 다시 낙양과 장안을 수복하는 계획이 마치 대나무를 칼로 쪼개듯 절로 해결될 것이다.

 

제갈량의 「초려대」는 논의가 신속하며 분석이 깊고 세밀해 유비는 막혔던 부분이 확 열리는 듯 했다. 유비는 24세 때 군대를 일으킨 이후 줄곧 중원 지역에서 활동했다. 지금 유표에 의지하기까지 오직 북방만 노려보며 힘 있고 세력이 강한 조조와 선두를 다투려고했지, 한번도 남쪽이나 서쪽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오두막에서 공명이 자신에게 가르쳐 준 길은 마치 첩첩이 쌓인 산과 계곡 사이, “산도 물도 다해 길도 사라진곳에서 홀연 밝게 빛나는 대로를 발견한 것 같았으니 어찌 기뻐 절로 춤이 나오지 않았으리? 사실 당시 유비가 처한 상황은 확실히 험난했다. 병력은 약하고 장수는 적으며 제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일단 조조의 대군이 남하하면 도대체 어떻게 막을 것인가? 또 이후 자신의 전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이번 제갈량이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대책은 유비를 위해 노력해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해 주었고, 이후 촉한 정권의 수립과 삼국의 정립(鼎立) 국면을 위해 참으로 생생하고 빛나는 청사진을 제공해 주었다. 이렇게 본다면 「융중대」는 촉한 정권의 건국 강령이었다. 나중에 관우가 형주를 잃어버리고, 유비가 효정(, 지금의 호북성 의도현 북쪽, 장강 북쪽 해안의 구부러진 곳)에서 패배하는 등의 여러 변화는 이때의 제갈량이 능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융중의 대책 이후 공명은 정식으로 유비의 정치집단에 참가하게 되었다. 현덕은 그를 상빈(上賓)으로 높여 팔다리처럼 의존했다. 조석으로 어떻게 하면 융중의 대책을 실현해 천하를 얻을 것인지 의논했다. 유비와 제갈량의 사이가 이처럼 나날이 깊어가자 관우·장비 등이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 생각엔, 이제 갓 오두막에서 나온, 아직 전쟁도 겪어보지 못한 청년서생을 너무 지나치게 예우하고 신임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유비는 내부의 단결을 위해 오랫동안 자신을 따라 생과 사를 넘나들던 장군들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으니, 원컨대 그대들은 다시 거론하지 마시오.” 그러자 관우와 장비가 불만을 그쳤다.” 고기는 자연 물을 떠날 수 없다. 유비는 스스로를 고기에, 공명을 물에 비유해 조그만 웅덩이에 있던 고기가 홀연 서강(西江)의 물을 얻었다고 했으니, 내심의 흥분과 희열은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리라. 이런 고기와 물과 같은 군신관계로 인해 당시의 정치적 국면에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대 시인 이백(李白), “고기와 물이 삼고초려로 만나서 사해에 풍운이 일어난다 魚水三顧合風雲四海生.”고 읊은 것은 바로 이 부분의 역사를 개괄해 묘사한 것이다.

 

제갈량은 조조의 대군이 조만간 반드시 형주를 남침할 것이라 읽고 있었다. 그러나 유비의 병사라 해봐야 기껏 수천 정도니 일격을 견뎌내기도 힘들 것이다. 그래서 공명은 유비에게 군대를 확충할 것을 건의했다. 유비가 말했다. “나 역시 걱정하던 바요. 어떡하면 되겠소?” 공명은 당시 형주 지역의 징병과 과세가 모두 호적에 근거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표의 정령(政令)이 느슨해진 틈을 타 권세 있는 지주들이 수많은 농민과 유민을 자신의 숨겨진 호구에 넣어놓고 호적상에 등기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지주들은 재력과 인력을 증대시켜 갔다. 또한 많은 외지의 유민이 몰려들었지만 일정한 거처가 없어 호적에 등록할 방법이 없었다. 제갈량이 보기에 이런 호구들이 1만 호는 족히 넘을 듯했다. 그래서 유비에게 대책을 말했다. “지금 형주는 사람이 적은 것이 아니라 호적에 오른 자가 적습니다. 호적만으로 동원한다면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남(鎭南, 유표는 한나라 조정에 의해 진남장군으로 봉해졌음)께 말씀드려 나라에 떠도는 호구들을 모두 다 등록하게 해 여기서 사람을 동원하면 될 것 입니다.” 유비가 알려준 대로 행하자, 유표 역시 조조의 남침을 깊이 두려워하고 있던 터라 군대를 확충하는 계획에 동의했다. 이렇게 유비는 형주의 떠도는 가구 중에서 많은 장정을 선발하고 훈련시킴으로써 수천에 불과하던 그의 군대는 1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명은 유표와 친척이었으므로 그의 큰아들 유기와 친해졌다. 이에 공명이 유기를 위해 화를 피하는 방법을 일러준 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건안 12(207)으로 제갈량이 유비에게 합류한 뒤의 일이다. 이듬해 봄, 손권은 유표의 병이 중함을 틈타 하구를 지키던 장수인 강하 태수 황조(黃組)를 습격해 죽이고 남녀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아돌아갔다. 이에 유기는 유표에게 강하 태수로 임명해 강의 방어를 맡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처럼 제갈량은 유기를 집안에서 입을 수 있는 화로부터 벗어나게 했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 유비를 위해 강을 방어하는 요지에 믿을 수 있는 군사세력을 심어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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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디벨로퍼아카데미(부동산개발협의회)
글쓴이 : 안병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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