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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훈아 그는 누구인가?

양사랑 2008. 6. 13. 14:24
나훈아 그는 누구인가? (상) 2004-09-28 12:09:03, 


[추억의 LP 여행] 나훈아(上)

영원한 트로트의 황제 세기의 라이벌시대를 열다

토속적인 음색과 다이나믹한 창법으로 대중을 사로 았던 나훈아. 남진과 벌였던 세기의 라이벌 전은 한국대중음악사의

한 을 장식했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외모의 남진과는 달리, 투박한 시골 총각 같지만 야성적인 나훈아는 데뷔 때부터

여고생부터 중년 부인에 이르는 폭 넓은 여성 팬을 거느렸다. 때문에 항상 스캔들이 끊이질 않았다. 또한 트로트

가수로는 드물게 작사ㆍ작곡이 가능했던 아티스트였다. 그가 작곡한 ' 갈무리’, ‘ 무시로’, ‘잡초’, ‘영영’ 등은 트로트의

발전적 장르인 '성인 발라드'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분명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트로트의 황제로 지금껏

군림하고 있다.


나훈아(본명 최홍기)는 1951년 2월 11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선원이었던 부친(최영석)이 이끄는 평범한 집안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중학교 때는 학교 야구 선수로 활약했다.

고향 뒷산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는 말썽을 피우더니,

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었다. 내친 김에 '가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집안의 반대가 거세자 "영도다리 밑에 풍덩 빠져

버리겠다"고 어머니에게 협박을 하고 무작정 상경, 집에서는 버린 자식 취급을 했다. 서라벌예고에 들어간 후에는 사무실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는 고단한 세월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의 떠꺼머리 총각이었다. 오아시스

전속작곡가 심형섭, 맘모스 레코드 작곡가 오영원 등 여러 작곡가 사무실를 찾아 다니며 가수 데뷔를 꿈꿨다. 결국 오아시스의 사환으로 들어가 회사 마루를 닦고 세숫물까지 떠 바치는 생활을 하며  영양실조에 걸렸을 만큼 배고픈 나날을 보냈다.

절치부심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장충동 녹음실에 심부름하러 갔다. 그 날 취입 예정인 가수가 나타나질 않자 주위 사람들의 농담에 이끌려 마이크 앞에 섰다. 노래를 부르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깜짝 놀란 오아시스 손진석사장은 즉석에서 그의 노래를 타이틀로 음반 제작을 결정했다. 데뷔는 이처럼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본명 최홍기란 이름은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 '최훈'이라 예명을

지었다가 너무 흔한 이름 같아 ‘ 훈아(羅勳)’로 개명했다. 헌데 사람들이 '나훈아 나훈아'하고 부르면서 ‘ 나훈아(羅勳兒)’로 최종 결정을 했다. 1968년 7월 데뷔 곡 ‘ 천리길'을 발표했다. 히트는 못했지만 “배호와 음색과 창법이 많이 닮았다”며 주목을 받았다. 최대 라이벌이 될 남진은 이때 군 입대를 했다. 몇 개월 후 ‘ 님 그리워'와 ‘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발표, 음반이

10만장이 넘게 팔려 나가 단숨에 인기 가수로 떠올랐다.


당시 나훈아는 하루에 100여 통의 팬 레터를 받았다. 별난 우편물도 많았다. 대구의 한 여성 팬은 '장차 나훈아와의 사이에 날 아기의 기저귀에 옷'이라며 소포를 보내 왔다. 또 부산의 여성팬은 '만나주지 않으면 청산가리를 먹고 죽어 버리겠다'며 협박 편지도 보냈다. 지방의 극장 공연에서는 늘 극성 여성 팬들에게 와이셔츠를 찢기고 손등을 할퀴더니, 심지어는 옷

속으로 손이 들어오는 봉변까지 겪었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대구극장과 시민회관 '워커힐 하니비쇼' 등 8개 극장 쇼에 줄

 펑크를 내자 관계자들 사이에서 '안하무인'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다 피너스 시스터즈의 멤버 강선희와 스캔들이

터지더니, '바보 같은 사나이'가 표절이란 이유로 방송 금지가 되면서 인기 행진은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인기가수

조미미와 히트송 바꿔 부르기로 인기를 회복, 70년 11월 '두 줄기 눈물'로 다시 차트 정상에 올랐다. 또한 70년 12월

김화근 감독의 코미디 영화 '웃겨주시네'에 이어 71년 2월 영화 '폭풍을 몰고 온 사나이'에 출연해 연기 재능도 뽐냈다.  


필생의 라이벌 남진이 군 제대로 복귀하자 정상의 가수였던 나훈아는 세기의 라이벌 시대를 맞았다. 최초의 '남진.나훈아

대결'은 71년 7월, 청계천의 국내 최대 살롱무대에서 시작되었다. 살롱측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의 대결 무대를 기획했다.

두 가수의 대결을 보기 위해 홀은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남진의 불참으로 불발탄이 되었다. 세간에 화제가 되자 MBC TV 가요프로 '오색의 화원'에서 두 가수를 초대해 노래 바꿔부르기로 자웅을 겨루게 했다. 이 프로그램을 기화로 두 청춘 가수의 세기의 라이벌 전은 본격화되었다. '나훈아가 판정승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자 남진은 시민회관 리사이틀무대로 승부를

걸었다. 9월 16일부터 나흘간 펼쳐졌던 '남진 귀국 리사이틀' 공연은 완전 매진이 되더니, 71년 최대 관객 옜澎綏歐沮?

세웠다. 이에 발끈한 나훈아는 곧 바로 응수했다. 10월 2일부터 3일간 '나훈아 리사이틀'을 열었다. 나훈아는 의상만

10여벌을 준비하고 '칼춤'에서 고고 춤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였지만 관객동원에서는 남진이 완승을

거뒀다.


72년으로 들어서며 서로의 연예활동 하나 하나에도 상대방을 의식하며 견제하기 시작했다. 나훈아는 나이까지 남진과

비슷하게 올렸다. 이번에는 나훈아가 선전포고를 했다. 72년 2월 '나훈아의 꿈' 시민회관 공연. 트로트에 팝송, 통기타를

들고 나와 당시 유행하던 포크송에 전통 북치기와 가극 '갑돌이와 갑순이'를 순서에 넣는 화려한 버라이어티 쇼로 승부를

걸었다. 이에 11개의 영화 촬영으로 눈코 뜰 새 없던 남진은 모든 영화 스케줄을 중단하고 김빼기 작전에 나섰다.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나훈아 그는 누구인가?(하) 2004-09-28 10:42:58, 


[추억의 LP 여행] 나훈아(下)

포크에서 팝까지 '만능 노래꾼', 한 시대 '화끈하게' 풍미





  
  
    
  
  
    
  

        
    


TBC-TV의 간판 쇼프로그램 <쇼쇼쇼>는 느닷없이 남진-펄시스터즈와의 조인트 리사이틀을 방송했다. 당시 TV쇼로는 드문 인천 해변에서의 야외 촬영이었다. TBC가 남진을 집중 지원하자 MBC는 나훈아 쪽으로 돌아서 가요계가 양분되는 부작용도 생겨났다. 남진은 3월에 나훈아와 똑같은 장소인 시민회관에서 <72 남진 리사이틀>도 개최했다. 하지만 결과는 5만명 대 3만명으로 나훈아의 완승이었다. 두 사람의 대결로 장안이 후끈 달아오르자 언론들은 두 가수의 신체 조건에서 스캔들까지 시시콜콜 들춰내 비교하면서 라이벌 전을 부추겼다. 타고난 음악성을 지닌 나훈아는 노래만 부르는 단순한 가수는 아니었다. 기타와 피아노를 연주하고 곡도 창작했다.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 '풋사랑'의 주제가를 비롯해, 히트곡인 이영숙의 '슬픈 사연', 강소희의 '그날밤' 등도 그의 창작곡이었다. 1971년엔 창작곡 '사랑은 장난이 아닙니다'를 조미미와 혼성 듀엣으로 불러 화제가 되었다. 72년 4월, 지구로 전속을 옮겨 박춘석사단에 합류, 첫 음반 '물레방아 도는데'를 발표했다. 또한 본지(주간한국) 주최로 명동 오비스 캐빈에서 열렸던 성점감상실 프로에 출연, 트로트 외에 포크송과 팝송까지 멋들어지게 불러 만능 가수로서의 능력을 뽐냈다.


72년 6월 시민회관 '쇼 스타 페스티발' 이틀째 공연 날. 마지막 순서로 등장했던 나훈아는 앵콜곡으로 '찻집의 고독'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남진의 사주를 받았다”고 횡설수설했던 김웅철이 깨진 사이다 병을 휘둘러 왼쪽 뺨을 70바늘이나 꿰매는 참변을 당했다. 무대에서 가수가 피습 당한 사건은 사상 최초였다. 구설수는 이어졌다. '숨겨 놓은 동거녀가 있다'는 스캔들까지 터지는 바람에 은퇴 소문이 나돌 정도로 휘청거렸다. 72년 8월의 신보 '고향역'은 반전의 신호탄. '머나먼 고향'이후 소위 나훈아의 '고향시리즈'의 하나인 이 노래는 정상으로 재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트로트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가수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준 첫 자작 곡 집 <해풍/그리움-지구72년8월>도 발표했다. 그 결과 72년 동양방송이 주최한 ‘방송가요대상’의 최우수남자가수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72년 12월 MBC10대 가수상 시상식. 남진과 가수왕 쟁탈전을 벌이던 나훈아는 대세가 기울자 명예 대위가 되어 파월 장병위문을 떠나 버렸다. 이에 발끈한 MBC는 방송금지처분을 내렸다. 당시 그의 매니저 강창호가 "''가수왕'을 주면 귀국시켜 출연시키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흥정을 했다는 이유였다. 파문이 커지자 나훈아는 귀국 후 MBC에 사과를 하고 “ 배우 고은아의 4촌인 이숙희와 3월 결혼과 더불어 년말에 은퇴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에 연예단장협회는 나훈아의 무대출연금지조치를 풀고 73년 3월 방송금지에서도 해제되며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결혼일자를 계속 미루고 지구레코드와 전속 연장계약을 맺으며 사실상 은퇴까지 번복하자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극비리에 공군에 자원입대 해, 큰 물의를 빚었다.


76년 7월 제대를 몇 개월 전 이혼을 한 나훈아는 2중 3중 전속계약으로 곤혹을 치러야만 했다. 이유가 있었다. 제대 후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11살 연상인 배우 김지미와 전격 결혼하겠다며 선언을 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이 그것. 두 사람은 71년부터 사귀어 왔던 사이. 세간은 그간의 모든 일이 김지미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한 것으로 밝혀지자 더욱 충격을 받았다. 나훈아는 모든 가수 활동을 중단하며 한동안 가요계를 떠났다. 79년 1월, 7년 만에 MBC TV '토요일 토요일 밤에'프로에 출연한 것을 기화로 김지미와는 결별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81년 10월 그 동안 갖고 있던 대전 홍진건설사장과 백제로터리 회장직을 버리고 태양레코드와 2억 원에 계약을 맺고 가요계 복귀를 선언했다.


1983년 재기 후 4집 '하얀 새'는 전례없이 팝 적인 분위기를 도입, ‘나훈아 혁명’으로 불린 음반이다. 가수 복귀를 반대해 왔던 김지미와는 결국 82년 6월 결별을 했다. 나훈아는 신보 '울긴 왜 울어'를 발표하고 영화 ‘외로운 사냥꾼’에도 출연했다. 이후 영화 제작 실패, 경영하던 업소의 사고로 흔들거렸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84년, 일본 데이찌구 뮬湄恙?전속 계약을 맺고 일본으로 진출했다. 일본의 주부들이 자발적으로 후원회를 결성하고 87년에는 동경에서는 '나훈아 노래 전국노래자랑'이 열리는 등 반응이 좋았다. 일본의 언론들은 “일본의 엔카 가수를 위협할 한국의 대표 가수”'로 그를 평가했다. 인기를 회복한 그는 85년 12월 4년 간 동거해 오던 14년 연하의 후배가수 정수경과 도옘병玲【?정식 결혼식을 하며 생활의 안정도 찾았다. 또한 자신의 음반사 '아라기획'을 설립해 '님'을 발표했다.


92년. SBS TV에서는 '나훈아 모창대회'가 열려 화제가 되었다. 또한 울산MBC가 주최하는 ‘제 5회 고복수 가요제’에서는 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94년에는 통산 2,000곡 취입 기념음반 '어매'를 발표했다.  96년엔 3회 대한민국연예술상 특별상을 수상하고 세기가 저물어 가는 99년 12월 30일에는 KBS 라디오의 '노유정의 트로트쇼'에서 벌인 여론 조사에서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남자 트로트 가수로 선정되었다.


악상 설명만 듣고도 곡을 소화하는 타고난 노래꾼 나훈아. 순탄치 않았던 개인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는 1970년대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했던 수많은 청춘들에게 향수를 달래주었다. 남진과의 필생의 대결 승부는 이미 오래 전에 승부가 결정된 듯 하다. 그는 지금까지도 40~50대 중년 여성들의 최고 슈퍼스타로 군림하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출처 : 언덕위의 하얀집 [지곡당]
글쓴이 : 가지울할아버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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